<한국인의 밥상> 겨울의 끝자락 바다의 참맛을 만나다

  • 2025.02.26 19:08
  • 5시간전
  • KBS

바다는 찬바람이 불수록 깊은 맛을 낸다. 바닷속 생물들은 추위를 견디려 지방을 축적하고, 살이 단단해지며 맛과 식감이 배가되기 때문. 사계절 중 겨울에 가장 맛있다는 바다의 별미와 겨울 바다의 추억이 가득 담긴 밥상을 만난다.

강원도 양양의 낙산항에서 30년 이상 고기잡이를 하는 김대곤(73세) 선장. 며칠 동안 동해안에 내려졌던 풍랑주의보가 해제되자, 서둘러 조업 채비에 나선다. 바다에 쳐놓은 그물을 며칠째 걷지 못한 데다, 겨울이 제철인 도치를 잡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도치는 평소 수심이 깊은 심해에 살다가 산란기가 되는 겨울이면 알을 먹는 심해의 천적들을 피해 연안으로 나와 빨판을 바위에 붙인 채 해초들 사이에 부화하는 동해안의 겨울 진객이다. 그 생김새가 심통 맞게 생겨 심퉁이라고도 불리는 도치는 물메기, 아귀와 함께 대표적인 못난이 생선으로 꼽히지만, 명태가 사라진 동해안에서 새로운 겨울 특산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물고기이기도 하다.

그가 풍랑을 헤치고 도치를 잡아 오자, 그의 아내 송연옥(65세) 씨는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도치 음식을 준비한다. 도치 수놈으로는 숙회를 만드는데 뜨거운 물로 점액질을 깨끗이 벗겨낸 뒤 적당한 시간 동안 삶아줘야 쫄깃하고 담백한 도치 특유의 맛을 얻을 수 있다. 과정은 번잡하지만, 맛은 어느 숙회에 뒤지지 않는단다. 도치 알은 소금물에 씻어 두부처럼 굳히는데 지금도 제사상에 올라가는 귀한 음식이다. 이렇듯 도치 음식 하나하나에는 도치와 더불어 살며 터득한 지혜와 정성이 담겨 있다.

남해안 끝자락에 있는 고흥반도에서도 6km가량 떨어져 있는 섬, 나로도. 일제강점기 때부터 삼치잡이의 전진 기지 역할을 했던 이곳은 예로부터 삼치로 이름을 날렸던 섬이다. 돌아다니는 강아지도 입에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융성했던 나로도항은 1980년대 들어 조업 기술이 발달하며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나로도 사람들은 여전히 삼치를 나로도의 자랑스러운 명물로 여기고 있다.

나로도의 겨울 삼치는 그 크기는 물론 조업 방식도 독특하다. 일단 나로도에서는 2kg 이상이 돼야 삼치 대접을 받는다. 우리네 밥상에서 흔히 보는 작은 삼치는 삼치 축에도 끼지 못한다. 조업 방식도 겨울에는 삼치가 바다 깊숙이 들어가기 때문에, 낚싯바늘을 바다 밑바닥까지 늘어뜨린 뒤 이리저리 끌고 당기며 삼치를 유인해 잡는데, 바로 나로도의 오랜 전통어업인 ‘땅바리’ 낚시다.

나로도의 마지막 ‘땅바리’ 낚시꾼인 김원태(59세) 선장. 풍랑주의보가 내려져 손발이 묶이자, 친한 형님 부부와 함께 마을 회관을 찾아 삼치 밥상을 준비한다. 성질이 급해 물에 올라오면 곧바로 죽는 삼치를 얼음에 재워두었다가 선어로 회를 뜬다. 살이 무른 삼치는 두툼하게 회를 떠내는 게 관건. 나로도 사람들은 입에서 살살 녹는 삼치 선어회를 먹어야 삼치 맛을 제대로 봤다고 말한다.

익히는 음식은 회를 먹은 뒤에야 시작하는데, 산란철인 봄을 앞두고 살과 지방이 잔뜩 차오른 삼치에 굵은 소금만 쳐서 은근한 숯불에 굽자, 지방이 녹으면서 고소한 향이 진동한다. 삼치회를 뜨고 남은 뼈로는 국물을 내 수제비를 넣어 삼치 어탕 수제비를 끓이는데, 서글픈 추억이 한 가득하다. 발에 치일 정도로 삼치가 흔했던 시절에는 뼈를 모두 버렸는데, 삼치가 귀해져 이제 뼈를 먹고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 그래도 삼치가 있어 한평생을 잘 살아냈으니 고마울 뿐이라는 나로도 사람들. 삼치를 먹으며 위로와 힘을 얻는 나로도 사람들의 추억이 깃든 밥상을 만나본다.

6월에 종패를 바다에 넣어 6개월 동안 키운 뒤, 겨울에 수확하는 홍가리비. 자연이 주는 먹이인 플랑크톤을 먹고 자라는 홍가리비는 찬 겨울 바닷속에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체지방을 늘리며 알을 탱탱하게 채우기 때문에 겨울이 제철이다.

10년째 홍가리비 양식을 하는 고흥군 강동마을의 손성주(60세) 씨와 부인 강난희(57세) 씨. 겨울의 끝자락에서 막바지 수확을 하느라 분주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 수확한 가리비를 크기별로 분류하는 작업이 끝나자, 강난희 씨는 곧바로 홍가리비회와 찜을 요리한다. 지난 6개월 동안 동고동락한 일꾼들과 함께 먹을 새참이다.

베트남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은 보통 해산물을 익혀 먹는 음식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홍가리비회를 거침없이 먹는다. 뜨거운 여름 바다와 차디찬 겨울 바다를 견디며 직접 키워낸 맛이니 특별할 수밖에 없다. 작황이 좋은 날, 마을에서도 풍성한 밥상이 차려진다.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홍가리비로 육수를 낸 뒤, 앞바다에서 채취한 미역을 넣어 가리비 미역국을 끓인다. 홍가리비 양식이 시작된 뒤, 새로 탄생한 음식이다.

강동마을의 앞바다는 미역뿐 아니라 김, 톳 등 해조류가 풍부한 청정 바다.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갯바위에 자생하는 톳을 직접 뜯어 겨울 바다를 터전 삼아 살아온 지난날의 애환을 나누며 톳밥도 짓는다. 겨울에도 손에 물 마를 날 없이 살아왔지만, 그 겨울 바다가 있어서 풍요로움을 누리고 살아온 강동마을 사람들. 두 세대가 힘을 모아 함께 차려낸 푸짐한 겨울 바다 밥상을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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