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 아흔아홉, 울엄마는 못 말려

  • 2025.07.25 15:32
  • 1일전
  • KBS

누구나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데, 입만 열면 “어서 가야 하는데, 왜 안가나 몰라” 하소연하는 어르신이 있다. 올해 아흔아홉 번째 여름을 맞는 조성임 할머니다. 그런데 나이가 무색하게, 기력도 짱짱하니 목청도 좋으시다. 눈만 뜨면 온 집안을 쓸고 닦고, 마당에 나가 풀도 뽑고 머윗대 까고, 마늘 까고, 몸체만 한 포댓자루도 손수 옮긴다.

그 곁에서 제발 좀 쉬시라고 읍소를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막내딸, 유홍실 씨(62)다. 4년 전, 신장이 망가져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어머니를 내 집에 모셔 온 홍실 씨. 거동을 못 하던 어머니 곁에 딱 붙어 수발드느라, 운영 중인 보험대리점은 직원에게 맡기고,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지극정성을 기울인 덕인지, 어머니는 점점 기운을 차리셨고, 지금은 다시 그 무섭던 ‘호랑이 울엄마’로 돌아오셨다.

청량리 시장에서 수십 년 동안 배추 장사를 하셨던 어머니는 병약한 아버지 대신 생계를 책임지며 5남매를 길러내셨다. 공부 욕심이 제일 많았던 막내 홍실 씨는 어려운 형편이지만 장학금을 받고 여상에 들어가 제법 좋은 회사에 취직도 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는 큰 자랑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어머니와는 살 부대낄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 병상에 있던 어머니를 모시면서 새록새록 정을 쌓았고, 어머니의 일상을 영상으로 담기 시작했다. 때로 억척스럽고, 때로는 귀엽고, 가만 들여다보면 짠한 울엄마 한마디 한마디, 주옥같은 어록까지 살뜰히 담았다.

어머니의 99세 생신을 맞아, 친정 언니들과 조카, 증손주들까지 한자리에 모인 날 홍실 씨는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왔던 엄마에 대한 기록을 선보인다. 왁자한 웃음과 함께, 뭉클한 감동을 나누는 그 순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라”는 딸들에게 “그런 소리 하지 마라”라며 손사래를 치신다.

여름볕이 따가운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잡초를 뽑으시는 조성임 할머니(99). 딸 사위가 아무리 말려도 들은 체, 만 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건 해야 해!” 역정을 내신다.

기력이 돌아오면서 온 집안을 활보하기 시작한 울엄마 새벽같이 일어나 구석구석 쓸고 닦고 사위의 구멍 난 바지며 속옷까지 기워주신다. 아무도 못 말릴 고집이지만 어머니만 좋으시다면 흔쾌히 백기를 드는 홍실 씨다.

홍실 씨네 집에는 4대가 함께 산다. 5년 전, 큰딸이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와 함께 살기 시작한 것. 엄마처럼 보험회사에 다니는 김라희(37) 씨는 출근 준비하랴, 아이들 챙기랴 시간이 빠듯하다. 그런 딸이 안쓰러운 엄마, 홍실 씨. 아홉 살, 여섯 살 손주들을 밥 먹이고 학교와 어린이집에 태워다준다. 그리고 낮에는 재택근무 하는 홍실 씨는 어머니께 내드린 안방 한편, 작은 책상이 사무실이다.

그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표 사이사이 어머니 드실 걸 챙긴다. 간식 창고가 동나지 않게 채워드리고 끼니마다 고기반찬을 올린다. 그 와중에 남편과 어머니 사이에 마음 상하는 일은 없는지 양쪽을 오가며 눈치까지 살핀다. 무던하고 밝은 성격, 언제나 호호 웃어주는 홍실 씨 덕에 대가족의 하루하루가 부드럽게 굴러간다.

일도 잘하고 어머니도 잘 모시고, 딸에 증손주까지 잘 보살피는 홍실 씨가 딱 하나 못 하는 게 있다. 바로 요리다. 그 빈틈을 메워주는 이가 남편 김기순 씨(62)다. 인상만 보면 상남자인 기순 씨는 홍실 씨가 ‘산도적’이라 부른다. 하지만 음식 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직접 간수를 뺀 소금으로 김치도 담그고 호박 볶아서 만두까지 뚝딱 빚는다. 심지어 장모님 드리겠다고 한약재 넣고 닭백숙을 끓이는 남자가 어디 흔한가.

더욱 고마운 건, 홍실 씨가 어머니를 모시고 싶다 했을 때 “우리 집에 모시자” 선뜻 나서주었다. 실은 홍실 씨도 10여 년 동안 시아버지의 병수발을 들었다. 기순 씨는 그때의 고마움을 갚을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 처음 장모님을 우리 집에 모셨을 때는 혹시나 밤에 무슨 일이 있을까 장모님 옆방에서 쪽잠을 잤다는 기순 씨. 퇴근길에는 장모님이 좋아하시는 꽃을 한 아름 사 들고 온다. 효녀 홍실 씨에 딱 맞는 짝꿍, 1등 사위, 기순 씨다.

2년 전부터 어머니의 일상을 기록 중인 홍실 씨.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들에겐 어머니의 안부를 전하는 편지가 되어준다. 오랜만에 언니들이 놀러 온다는 소식에 홍실 씨는 영상을 편집해서 가족들 앞에 특별 상영회를 연다.

어머니의 아흔아홉 번째 생신날엔 홍실 씨의 둘째 딸, 김소희 씨(35)도 찾아와 온 가족이 생신 축하 노래도 불러드리고 증손주들은 열심히 연습한 춤 솜씨로 재롱 잔치를 선보인다. 뜻깊은 날, 가족들은 백 년을 살아온 소회를 물어보는데 늘 후렴처럼 달고 사시는 그 말씀을, 오늘도 꺼내신다. “너무 오래 살아 미안해 어서 가야 하는데”.

평생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울엄마. 백수를 누리면서도 자식들한테 폐가 될까, 속 편히 웃지도 못하는 울엄마. 그런 엄마에게 마음으로 전하는 편지가 있다. 남은 날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하루하루가 즐거운 소풍 같고, 행복한 잔치와 같기를 그 곁에서 딱 붙어서 잔소리를 들어드릴 테니 지금처럼 내 멋대로 사시기를.

  • 출처 :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