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시간여행자> 400여 명 죽인 사상 최악의 호랑이, ‘백액호’ 등장?! 조선시대 ‘착호갑사’와 한반도의 호랑이 집중 탐구

  • 2026.08.28 10:29
  • 55분전
  • KBS

한반도는 호랑이의 중요한 서식처였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나타난 것처럼 호랑이 역사는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시베리아 호랑이를 백두산 호랑이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용맹함과 강인함, 민족 기상의 상징 호랑이. 하지만 조선시대 호랑이는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오는 30일 방송되는 35회에서는 조선을 휩쓴 호환의 원인과 그 규모, 이를 막기 위한 대응 전략과 방법을 통해 조선이 국가 통치 이념 ‘위민제해(爲民除害)’를 어떻게 실행했는지 돌아본다.

조선은 민본주의, 농본주의 국가였다. 건국 초기부터 농업을 장려하며 대대적인 국가 주도 농지 개간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연쇄적 생태계 붕괴가 초래됐다. 결국 먹이와 서식지를 잃은 호랑이가 인간의 땅으로 향하게 된다.

‘호환’은 순식간에 조선의 국가적 문제로 부상했다. 민가와 도성, 심지어 궁궐까지 침투한 호랑이는 제주도와 울릉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매년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맹수의 제왕, 산군 호랑이의 힘 앞에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고, 심지어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인간의 영혼은 창귀라는 귀신이 돼서 다른 인간을 해친다고 믿었다. 당시 조선의 호환 피해 실태와 역사에 기록된 정황을 낱낱이 파헤쳐본다.

살아 있는 사람을 해치는데 호랑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밤새 울부짖는 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매우 빈번하고 일상적으로 일어났던 피해였습니다.

조선의 가장 큰 재난 중 하나로 인식할 정도였습니다.

조선은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한다는 ‘위민제해(爲民除害)’ 원칙에 따라 국가적 재난인 호환에 대응할 호랑이 잡는 특수 부대 ‘착호갑사’를 조직한다. 착호갑사는 궁술, 창술, 근력 등 다양한 과목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난이도를 지닌 시험을 통해 선발했다. 호환이 급증함에 따라 세종 때 80명에서 성종 때 440명까지 늘어났고, 이들은 호전(虎箭), 함기(檻機) 같은 특수 무기를 사용하며 호랑이와 맞서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산을 누볐다. 막강한 무력을 지닌 착호갑사의 호랑이 사냥 과정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힘이 세고 용맹한 자를 선택하여 임명한다.

시험을 면제하고 착호갑사에 임명한다.

1571년 조선에 이마가 흰 호랑이, ‘백액호’가 나타났다. 백액호는 거대한 크기와 압도적인 힘으로 가축과 사람 400여 두를 죽였다. 이때 경기도 일대는 백액호뿐 아니라 여러 호랑이에 의해 호환이 속출했다. 선조는 대대적인 호랑이 토벌 작전을 지시했다. 한 달간 이어진 백액호와 호랑이 사냥. 과연 그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조정에서 대대적으로 포획하게 했다.

조선 백성을 공포에 떨게 한 호랑이는 용맹함과 의로움의 상징으로도 여겨진다. 무관의 흉배에 호랑이를 새기고 관모에 호랑이 수염을 꽂아 용맹함을 나타내기도 하였으며, 시집가는 신부의 가마 위에 올리는 호랑이 가죽이 액운을 물리친다고 믿기도 하는 등 호랑이는 조선 사회에 파고들었다.

임진왜란은 조선뿐 아니라 백두산 호랑이에게도 수난의 시기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호랑이 고기를 주문하면서, 일본 장수들은 본토에서 볼 수 없던 호랑이를 사냥하는 것으로 자신의 용맹을 증명하려고 나섰다.

일본의 한반도 호랑이 사냥은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졌는데, 조선총독부가 ‘해로운 짐승을 없앤다’라는 명분으로 ‘해수 구제’ 사업을 벌이며 한반도의 호랑이를 멸종시켰다. 특히 당시 일본인들은 호랑이 고기 시식회를 열며 침략의 성과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이 저지른 호랑이 사냥의 배경엔 호랑이로 상징되는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오랜 세월 한반도에서 살아가며 두려움의 대상이자 숭배의 대상으로 조선의 역사를 뒤흔든 호랑이 이야기가 30일 일요일 밤 9시 30분, KBS 1TV 35회 ‘호랑이를 잡아라! 조선 특수부대 착호갑사’ 편에서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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