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 '우리 각시는 스물두 살' 치매에도 변치 않은 산골 노부부의 사랑

  • 2026.02.20 11:23
  • 4시간전
  • KBS

고요한 산골 마을의 아침, 밤새 쌓인 눈을 쓸고 마당에서 장작을 패는 노인이 있다. 여든여섯의 나이에도, 매일 지게를 지고 산에서 나무를 해오는 전경석(86) 씨. 여전히 옛날 아궁이에 불을 때는 이 오래된 집의 주인이다.

아내 임종순(83) 씨와 함께, 단둘이 지내던 집에 변화가 생긴 건 2년 전이다. 막내딸 순희(52) 씨가 돌아오면서 집안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살던 순희 씨에게 온수조차 나오지 않는 집은 불편한 것투성이다. 누군가는 왜 이렇게 불편한 집에 사느냐 할지 몰라도, 160년의 세월을 품은 이 집은 경석 씨의 인생이자, 자부심이다. 대들보의 ‘상량’부터 부엌에 자리하고 있는 우물까지, 손님이라도 찾아오면 집안 곳곳을 자랑하기 바쁘다. 또, 마루 아래 숨겨져 있는 신발장과 한겨울에도 상추가 자라는 비닐하우스는 경석 씨가 직접 만들었다.

평생을 살아온 집안 곳곳엔 경석 씨의 삶의 지혜가 숨어 있다. 매일 동분서주 집을 살피는 경석 씨와 그런 남편을 하루 종일 따라다니는 종순 씨. 두 사람이 이렇게 살아온 지도 어느덧 60년이 넘었다. 오후 6시면 모든 일과가 끝나는 산골짜기. 하지만 경석 씨는 또 할 일이 있다. 바로 아내와 치는 ‘고스톱’. 사실 경석 씨는 그림 맞추는 정도의 실력이라, 마을회관을 주름잡던 아내와는 영 게임이 안 된다. 그럼에도 경석 씨가 매일 아내와 판을 벌이는 데엔 이유가 있다.

요즘 들어 틈만 나면 거울을 들여다보는 종순 씨는 경석 씨에게 “나 예쁘지?” 묻고는 꼭 “나는 스물두 살, 당신은 스물다섯 살”이라고 덧붙인다. 3년 전 치매를 진단받은 후, 나이를 물으면 늘 스물두 살이라 답하는 종순 씨. 큰아버지를 따라 양평 산골짜기로 시집올 때 새색시 나이는 스물둘이었다. 농사를 짓고, 벌을 치고, 숯을 굽는 일까지 4남매 먹여 살리기 위해 돈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해온 부부. 일하느라 바빠서 교대로 밥을 먹던 날도 많았다. 그렇게 4남매 모두 출가시키고, 이제는 평온한 노후를 보내나 싶었다. 그런데 아내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산골 마을로 시집와 평생을 고생만 하고 이제는 기억이 멈춰버린 아내가 미안하고 애틋한 경석 씨. 눈이 오면 종순 씨가 자주 지나다니는 길목부터 쓸어놓고, 혹시라도 넘어질까 어딜 가던 손을 꼭 잡고 다닌다. 그야말로 산골짜기 사랑꾼이다. 앞으로도 이렇게 함께 늙어가고 싶은데,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다.

“다음 생에도 나랑 살 거야?”라고 묻는 경석 씨의 말에 종순 씨는 “그럼, 영감이랑 안 살면 누구랑 살아”라고 대답한다. 스물두 살 각시와 여든여섯 살 서방님은 오늘도 꼭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아프기 전까지, 무려 30년 동안 오리주물럭 장사를 했던 종순 씨. 양평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혼자서 그 많은 손님을 다 책임지던 엄마가 지금은 밥을 짓는 법조차 잊었다. 장독대 안 씨간장부터 된장까지 모두 손수 담갔던 종순 씨. 엄마의 기억이 흐려지면서 이제는 순희 씨의 몫이 되었다.

집안에 콩 삶은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날. 마루에 앉아 지푸라기로 새끼를 꼬는 순희 씨와 아빠 경석 씨. 밖에서 사다 먹으니 영 맛이 안 난다는 경석 씨의 말에, 순희 씨가 직접 청국장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며칠 뒤, 무사히 완성된 청국장. “엄마, 기억나?”라고 묻는 순희 씨의 말에도 대답 없던 종순 씨가 갑자기 부엌으로 향한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 두부를 썰기 시작하는 종순 씨. 엄마의 기억이 돌아오기라도 한 것일까.

지난 세월이 살아 숨 쉬는 오래된 집, 그 집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세 식구의 애틋한 시간을 따라가 본다.

  • 출처 :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