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밥상> 여름의 길목, 은빛 열정을 낚다

  • 2025.06.18 17:44
  • 6시간전
  • KBS

여름의 길목, 물빛에 은빛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하면 녀석들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이 계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버들 은어’라고도 불리는 6월 은어가 그 주인공이다. 임금님 진상품으로도 유명한 은어는 물살과 지형에 따라서 잡는 방법도 다양하다. 세찬 물살을 거슬러 올라와 최고의 맛과 향을 내는 은어 밥상을 만나 본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이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피아골. 10살 때부터 물놀이 삼아 아버지와 동네 형들을 따라 은어 잡이를 시작했다는 박석근(52세) 씨와, 10년 전 귀촌해 이제는 석근 씨의 경쟁자가 되었다는 최호(54세) 씨가 은어 낚시에 한창이다. 이들의 은어 잡이 방식은 구례와 하동 지역 토박이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전승돼 온 ‘걸갱이 낚시법‘이다.

은어의 몸통을 낚싯바늘로 긁듯이 채는 방식으로 은어의 습성을 알고, 그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해 숙련된 기술과 체력이 필수다. 매해 은어철이 시작되면 마음부터 바빠진다는 둘은 갓 잡은 싱싱한 은어로 별미들을 척척 만들어 낸다. 뼈가 연하고 향이 진해 미식가들 사이에서 최고의 맛으로 알려진 6월 은어는 통째로 그냥 썰어 내도 맛있지만, 회를 치고 껍질을 벗겨 부위별로 다른 음식을 만들어도 좋다. 껍질은 튀김으로, 쫀득하고 부드러운 은어 살은 회무침으로도 제격이다. 은어 살에 식초를 넣어 탱글탱글한 식감을 더하고, 각종 채소와 집안 비법인 수제 초고추장을 넣어 무쳐주면 다른 데서 맛볼 수 없는 석근 씨 표 은어회무침이 완성된다. 들기름에 은어를 볶아 진하게 끓인 은어 곰탕과 다슬기를 듬뿍 넣어 끓여 낸 다슬기 백숙은 이 지역 최고의 여름 보양식으로 꼽힌다. 자연이 차려낸 ‘진짜배기’ 밥상을 맛본다.

왕이 전란을 피해 몸을 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굽이굽이 골이 깊은 왕피천은 유명한 은어 서식지 중 하나다. 추충호(70세) 씨와 마을 남자들이 대대로 만들어 써 왔다는 은어 잡이 기구를 들고 길을 나선다. 이곳의 은어 잡이는 계곡물의 낙차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마을 토박이 김미자(67세) 씨는 은어철이 되면 은어 잡기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새벽부터 자리다툼을 하던 그리운 시절을 떠올린다.

가난했던 시절, 고등어 한 마리 사기 힘들었던 산골에서는 은어만큼 기다려지는 음식도 없었다. 오늘도 미자 씨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눌 은어 밥상을 준비한다. 산골에서 은어는 오래 두고 먹어야 할 귀한 음식이다. 염장을 한 후 빨랫줄에 널어 반건조한 은어로 석쇠 구이를 한다. 4대가 함께 살았던 미자 씨 집에서 은어구이는 할아버지만 드실 수 있었던 귀한 음식이었다.

여름의 길목, 가장 싱싱한 은어만 골라 했다는 은어밥도 빠질 수 없다. 아궁이에 솥 밥을 하고, 뜸 들 때 은어를 꽂아 넣어 형체가 그대로 살아있는 은어밥은 이 계절만 즐길 수 있는 별미다. 오래 두고 먹기엔 은어 젓갈만 한 것이 없다. 멸치액젓 구경하기 힘들었던 이곳에서는 은어 액젓으로 나물을 무쳐 먹었단다. 은어철이면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하는 은어의 귀환을 환영하는 잔칫상에 오늘도 마을이 들썩인다.

섬진강의 가장 긴 지류 중 하나인 보성강. 낚시꾼들이 보성강의 은빛 보물을 낚는다. 쉽게 보기 힘든 기다란 9-10m짜리 낚싯대를 들고 은어 낚시에 한창인 한용범(68세) 씨는 은어철이 되면 3~4개월을 보성 강가에 숙소를 잡아놓고 산다. 그 곁에는 올해 아흔인 김동진(90세) 어르신이 있다. 고기를 너무 잘 잡아 ‘섬진강 갈매기’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김동진 어르신은 열일곱 살부터 은어 낚시를 시작해 은어 잡이로 가족을 꾸리고 집안을 일궈왔다.

둘은 은어로 인연이 돼 벌써 40년 지기다. 이들의 낚시 미끼는 다름 아닌 ’씨은어‘다. 살아있는 은어의 코와 배에 바늘을 달고 다른 은어의 영역에 들어가게 한 후, 자기의 영역을 침범해 화가 난 다른 은어가 씨은어를 공격할 때 바늘에 걸려들게 하는 방식이다. 공격성 강한 은어의 습성을 이용한 고수들의 낚시법이다.

은어 잡이 고수 한용범 씨는 맛에 대한 기준도 남다르다. 같은 구이라도 더 맛있게 만들기 위해 특별한 화로를 선보인다. 지느러미와 꼬리 부분에 소금을 듬뿍 발라 숯불에 타는 걸 막은 후, 화로에 꽂아 살을 서서히 익힌다. 그래야 향까지 듬뿍 머금은 바삭하고 촉촉하고 부드러운 은어구이가 된다. 감자와 무를 깔고 끓인 은어 매운탕, 반죽에 맥주를 넣어 튀긴 은어 튀김까지 은어 맛 제대로 살리는 노하우가 담긴 은어 낚시 고수들의 인생이 담긴 음식을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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